한국불교학회, 월정사 선운사 학술대회 공동개최

조계종 교육아사리 자현스님이 발제를 하고 있다.

자현스님은 ‘석전과 한암을 통해 본 불교와 시대정신’을 주제로 한 발제에서 일제강점기 청정한 계행으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켜간 두 스님의 행장과 사상에 대해 고찰했다.

역사적으로 한국불교는 두 차례에 걸쳐 청정성의 근간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 <고려사> 권39의 충렬왕7(1281)년 기록에는 “승려 중 결혼해 생활하는 자가 반이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티베트불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태고보우, 백운경한, 나옹혜근 무학자초스님들이 등장해 불교의 청정성을 회복하게 된다.

두 번째 위기는 일제강점기이다. 일본불교가 유입되면서 대처식육이 번지게 된다. 만해스님은 한발 앞서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대처를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조선총독부가 이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이후 대처문화는 빠른 속도로 퍼졌다. “일본 유학승들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고 “당시 최고 지식인알고 할 수 있는 이들 유학생이 한국불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국불교의 풍토를 일변”했다.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이 1925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비구 스님이 6324명, 비구니 스님이 864명이었다. 자현스님은 “대처의 숫자가 약 4000명으로 추정된다”며 “당시 한국불교의 3분의2 정도가 결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이런 탓에 불교정화가 시작될 무렵엔 전체 6500명 스님 가운데 4%인 260명이 비구 스님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 석전스님이 1926년 <계학약전>을 편찬해 주목된다. 자현스님은 <계학역전> 찬술이 “대처문제로 인해 한국불교의 청정 출가전통이 위협받던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봤다. “계율은 율이란 특성상 반드시 실천적인 면모가 겸비돼야 한다”며 “석전스님은 계행에 있어서도 철저한 면을 보인다”고 말했다. 또 석전스님은 “과도한 선풍에 의한 무애행을 질타”하기도 했다. <석림수필>에서 스님은 위산이 앙산에게 ‘자네의 안목이 바른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지 자네의 행리는 말하지 않는다’를 언급하며 ‘행리를 말하지 않는다’가 ‘행리를 중시하지 않는다’로 와전돼 살도음망의 네 가지 바라이죄가 무애행으로 자행됐다고 문제제기 한바 있다.

이날 세미나에는 많은 사부대중이 참석했다.

한암스님은 당대를 대표하는 선사다. 자현스님은 “한암선의 가장 큰 특색이 바로 선계일치”라고 말했다. 스님의 투철한 계율의식은 한암스님의 좌우명인 ‘계잠(戒箴)’을 통해 볼 수 있다. 계잠은 ‘선정은 마땅히 이 여덟 가지 법을 실천해 청정함을 얻는다(禪定宜以八法而得淸淨)’는 8항목과 ‘지계는 이 여덟가지 법을 구족하게 해 청정함을 얻는다(持戒以具足八法而得淸淨)’ ‘불방일은 여덟가지 법을 실천해 청정함을 얻는다(不放逸以八法而得淸淨)’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스님의 청정가풍은 이미 일제 총독부에도 알려진 사실이다. 스님은 3번째 종정으로 추대된 1941년 “공부하다 말고 서울엘 갈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해 결국, 총독부가 ‘불출산해도 좋다’는 임명을 내려 종정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한암스님 역시 석전스님처럼 무애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스님은 <경허집> 서문에 “후대에 배우는 이는 화상의 법화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를 배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람들이 믿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자현스님은 “1962년 창종한 대한불교조계종이 일제강점기 임제종과 조계종, 해방 후 대한불교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석전과 한암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정초를 확립한 분들”이라며 “이분들이 계율을 통한 청정승단과 선을 지향했다는 점은 오늘날 조계종의 종취와 일치하는 한국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꼽았다. 또 “현대사회에서 윤리의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계율에 바탕을 둔 석전, 한암스님이 보인 교학과 선수행은 더 주목된다”며 “두 스님의 계율 강조는 오늘날 한국불교가 나아갈 지남이 되기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원로의원 현해스님은 일제강점기 국민정신을 이끌었던 두 스님을 기억하며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한국불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해 공감을 얻었다. 스님은 “일제 때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엔 우리말을 쓰면 매를 맞고 황국시민선서를 외우지 못하면 차표도 팔지 않았다”며 “일본불교가 한국불교를 흡수시키려 하던 때 조선불교조계종을 설립해 한암스님은 초대 종정을 맡았고 대를 이어 석전스님이 종정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큰스님들이 암울한 시대 국민정신을 이끌었던 것과 달리 지금 불교계는 국민 가슴에 올바른 소리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제 자신도 부끄러울 뿐”이라며 “과거 큰스님의 뜻을 기리는 이 자리가 현재, 미래를 이끌어갈 스님들이 많이 배출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편 학술대회에서는 10명의 발제자들이 석전스님과 한암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했다. 한암스님과 관련해서는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근대한국불교에서 한암의 역할과 불교사적 의의’에 대해, 이덕진 창원문성대 교수가 ‘한암의 선과 계율정신’에 대해 발표했다. 또 윤창화 민족사 대표가 ‘한암선사의 공안과 선문’에 대해,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혜명스님이 ‘천태에서 본 한암스님의 선사상’에 대해 발제했다.

석전스님에 대해서는 교육원 교육부장 정도스님이 ‘한국불교와 석전영호의 위상’, 포교원 포교연구실장 법상스님이 ‘석전의 계율관과 계학약전’을 주제로 발표했다. 신규탁 연세대 교수는 ‘석전 박한영 강백의 교학 전통’을, 고영섭 동국대 교수는 ‘영호 정호와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고찰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석전과 한암의 문제의식’에 대해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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