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바르게 의식 보전하는 ‘관찰’

#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보전 하는 법

바른 사념은 불교의 바탕인 
연기 법칙 따르는데서 출발

우리는 항상 생각과 같이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항상 같이하는 ‘나’라는 인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내가 보고 들은 사실을 다시 재편집하여 전혀 다른 거짓말로 꾸며낼 줄도 안다.

즉 ‘나’ 라고 느끼는 나와 ‘느끼는 나’를 다시 보는 나를 동시에 똑같은 나라고 생각한다. ‘거울 앞의 나’와 ‘거울에 비친 나’를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인식은 그러므로 혼돈이다.

거울 앞에 서 있는 내가 고통에 울고 있다면, 울고 있는 모습이 비춰진 거울의 나는 실재의 나 때문에 다시 내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 나의 안에서 보고 듣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타자화(他者化)되어 내가 왜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에서 지혜는 사라지고 고통의 영상만 남는다. 결국 고통의 인식은 집착(執着)이라는 왜곡을 통해 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즉 내가 어디서부터 나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몸은 실재인데 인식은 가짜라면 그곳은 어디일까? 꿈속일까 실재일까? 꿈속에서 벗어나야 그나마 거짓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곳은 미망(迷妄)의 삶. 윤회의 쳇바퀴 속일 것이다. 나티카 마을에서 윤회의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경(法鏡)을 알려주신 부처님께서는 자부심이 가득한 명문(名門) 리차비족이 살고있는 베샬리로 가셔서 바르게 생각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윤회의 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끝없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비구들이여! 비구가 바르게 사념(思念)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이겠는가? 그가 몸에 대해 이것을 잘 관찰하고 진정 바르게 의식을 보전하는 것이니라.

다음에 비구들이여! 바르게 의식을 보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이겠는가? 그가 앞으로 나아갈 때도 뒤로 물러날 때도, 앞을 볼 때도 뒤를 볼 때도, 상가티 옷(衣)과 발우, 옷을 수지(受持)할 때도, 먹거나 마시거나 맛을 볼 때도 바르게 의식을 보전한다는 것이니라.”

내가 어디서부터 나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어떤 범주의 개념인 처(處)라 이름 붙여, 안이비설신의로는 육내입처(六內入處)이며, 색성향미촉법으로는 육외입처(六外入處)로서 ‘인식하였다’ ‘인식되어졌다’라는 나(我) 중심의 왜곡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바른 사념(思念)은 불교의 바탕(根幹)을 이루는 연기(緣起)의 법칙을 따르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라는 인식은 따로 있지 않다. ‘이것은 코끝에서 들이쉬는 호흡이다’ 느껴질 때 ‘나’라는 인식과 함께한다. 즉 코끝에서 내쉬어지는 호흡과 생각(思念)은 연기(緣起)적인 생(生)으로 함께한다. ‘이것이 호흡이다’ 다만 그뿐이다. 그 속에 ‘나’라는 개념은 없다. ‘내가 느끼고 내가 호흡한다’라는 망념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호흡의 들이쉼이 있으므로 코끝에서 느껴짐이 있다’라고 명명한다. 위 부처님 말씀의 인용문에서 ‘몸에 대해 이것을 잘 관찰하고’라고 할 때, 몸을 관찰한다는 의미는 이와 같다. 이와 같은 관찰을 언제 어디서나 행하는 것이 또한 바르게 의식을 보전하는 길이다. 이것이 또한 윤회의 질곡에서 벗어난 비구들에게 다시 일러주신 베샬리에서의 가르침이다. 

효산스님  부산 여래선원 주지
효산스님  부산 여래선원 주지

[불교신문 3812호/2024년3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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