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생시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법은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작용에 드러나는 것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이러한 가르침을 설명할 때 연기법을 전제로 한다. 이전의 글과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중요한 내용이라 거듭 언급한다.

연기에는 외연기(外緣起)와 내연기(內緣起)가 있다. <요본생사경>, <도간경> 등에 의하면, 외연기는 씨앗·싹·줄기 등의 관계로 설명하고, 내연기는 무명(無明)에 의해 행(行)이 일어나고 나아가 노사(老死)가 일어나는 관계, 즉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설명한다. 따라서 외연기는 바깥 사물 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내연기는 마음 작용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런데 연기가 설해진 본래 목적은 내연기다. 외연기는 복잡한 내연기를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든 경우다.

필자 경험을 예로 들어 외연기와 내연기를 설명해보겠다. 고등학생 때였다. 더운 여름날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세수하고 눈에 보이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장난꾸러기 친구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얼굴 다 닦았나?” “응.” “그거 걸레다.” “…”

교리 설명이 딱딱하다는 반응이 있기에 가벼운 예를 들었다. 여기서 그것은 수건인가, 걸레인가?

제법무아를 외연기로 설명하는 경우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수건이든 걸레이든 많은 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수건이라고 할 것도 걸레라고 할 것도 없다. 많은 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수건 또는 걸레라는 실체가 없다. 제법무아다.

내연기로 설명해보자. 주어진 상황에서 앞에 수건처럼 보이는 것이 있고, 나는 그것을 수건으로 여겨 얼굴을 닦았다. 친구는 그것을 집에서 방을 닦는 걸레로 사용하였기에 걸레라 하였다. 각각의 상황 조건에 따라 수건 또는 걸레로 나타났을 뿐, 그 자체에는 수건 또는 걸레라는 실체가 없다. 제법무아다.

제법무아의 가르침에 다가가고자 외연기와 내연기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이 수건 또는 걸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이 어떻게 수건 또는 걸레로 나에게 나타나는가. 외연기로는 이러한 설명이 힘들다. 수건 또는 걸레가 많은 실로 되어있지만[외연기], 그것이 나에게 수건 또는 걸레로 드러나는 것은, 내가 그렇게 인식, 분별하기[내연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나는 이전 경험으로 수건을 알고 있고, 지금 내 앞에 수건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나타나니, 수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따져보니 그것은 수건으로 보일 뿐 수건 그 자체는 아니다. 그 자체가 수건이라면 친구에게도 수건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즉 바로 내 눈앞에 보이는 수건은 수건이라고 할 고정된 자성이 없다. 단지 수건이라고 이름 붙여졌을 뿐 이름 너머에 수건이 고정된 모습으로 있지 않다. 제법무아다.

나에게 펼쳐진 세상[법]이 모두 그렇다. 법은 ‘그 자체’가 아니라 여러 여건 속에 마음 작용을 따라 ‘나에게 드러난 것’이다. 수건, 걸레 등은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여건에 의해 나와 관계 지어 일어난다. 마음 작용으로 연기(緣起)된 것이지 그 자체에 수건, 걸레 등의 실체는 없다. 그렇게 실제 있다고 보는 것은 꿈을 생시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전도몽상이다.

목경찬 천안 각원사 불교대학 교수
목경찬 천안 각원사 불교대학 교수

[불교신문 3812호/2024년3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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