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안개 푸르게 바뀌고 산은 호랑이 닮았네

경복궁에서 마주 보이는 호암산은 호환을 불러올 형국으로 여겨졌다. 호랑이 기운을 누루기 위한 방편으로 호압사를 세웠다. 사진은 지금의 호압사.
경복궁에서 마주 보이는 호암산은 호환을 불러올 형국으로 여겨졌다. 호랑이 기운을 누루기 위한 방편으로 호압사를 세웠다. 사진은 지금의 호압사.

천도 후 한양 도성 위협 기운
산꼬리에 '호압사' 세워 눌러

사자암 창건해 호랑이 견제도

서울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전쟁의 참화를 많이 겪었다. 수도가 갖는 필연적 운명이었다. 따라서 수도를 정한 뒤에는 그 수도를 지킬 수 있는 성벽을 둘렀고, 사방에 방어 거점을 만들어냈고, 그곳들을 지키는 특별한 군대를 배치, 유지하였다. 이런 물리적인 방법만으로는 안심을 하지 못한 선인들은 풍수지리라는 상징체계를 가져와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여러 차례 외침과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수도 한양의 길흉을 둘러싼 다양한 전설과 야사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중첩되고 변개, 변모하면서 서울은 거대한 이야기의 숲을 이루었다. 그 숲을 풍성하게 이끈 오랜 고목은 바로 사찰이었다.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한강 너머 마주 보이는 관악산과 호암산은 위험한 존재였다. 관악산은 화기(火氣)가 넘쳤고, 호암산은 호환(虎患)을 불러올 형국이었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 곳곳에 절을 지었고, 관악산을 마주 보고 있는 남대문(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써서 달았다고 한다. 호암산에는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방편으로 호압사(虎壓寺)가 세워졌다. 호압사 인근 삼막사(三幕寺) 사적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이때 무학(無學)이 있었으니 나옹의 제자이고 풍수지리의 학문에 매우 뛰어났다. 우리 태조(이성계)께서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들여 서울[國都]을 정하게 하니, ‘외백호(外白虎)의 지세(地勢)가 급하고 형태가 위태로워 내달리는 기운이 많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위에 절을 세워 호압(虎壓)이라 이름하여 억누르고, 그 앞에 암자를 지어 사자(獅子)라고 하여 위협했으며, 그 옆에는 개를 묻어 사견우(四犬隅)라 해서 두었다.(<삼성산삼막사사적>)

호암산은 북쪽으로 뻗어가는 모양이 마치 호랑이가 걸어가는 것 같았고, 정상부에 돌이 높이 솟아 있어 이를 호암(虎巖: 호랑이 바위)이라 불렀다. 호랑이는 어떤 동물도 대적할 수 없는 맹수지만 꼬리를 제압당하면 힘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호랑이 산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세워 사나운 기운을 누르고자 한 것이다. 더불어 호압사 앞쪽에 암자를 지었고, 이를 사자암(獅子庵)이라고 이름하여 호랑이를 견제하였다. 이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이지 않았는지, 산의 동서남북 네 귀퉁이에 돌로 만든 개를 묻어 놓았다. 지금 호압사는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

한양 사는 사람들 ‘심리’ 반영
설암문인 사적에 설화 수록해
1841년에는 의민스님도 ‘작성’

15세기 금천현감을 지닌 윤자(尹慈)는 ‘호암설’을 통해 호압사 북쪽으로 7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다리인 궁교(弓橋)까지 소개하며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급소인 꼬리를 잡아 누르고, 같은 맹수인 사자로 견제하고, 사냥개로 포위한 뒤에, 활을 쏘아 사나운 호랑이를 잡으려 한 셈이다.

그런데 윤자가 호암산과 호압사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소개한 것은 지기, 지세, 지형을 가지고 길흉화복을 따지는 풍속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은 타고나는 것이지 산과 물이 이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불행과 재앙은 바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서 온다고 하였다. 윤자가 금천현감으로 부임한 1450년은 세종대왕이 돌아가고 문종이 즉위한 해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윤자를 검색하면, 1455년 사헌부 지평으로 등장하여 1470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일했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이로써 추정해 보면, 윤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격변기를 겪지 않았고, 왕자의 난(1차 1398, 2차 1400년)과 같은 혼란을 목도하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치세(1418~1450년)를 살았고, 아직 수양대군의 계유정난(1453년)을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풍수설에 더욱 회의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앞에서 소개한 호압사 이야기가 실린 <삼성산삼막사사적>은 1771년에 설암문인(雪巖門人)이 작성한 것이다. 이때, 즉 18세기 후반은 이미 한양의 주요 궁궐이 불탔던 왜란은 물론 인조가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하고, 관군과 반란군이 한양 도성 밖 안현에서 전투를 벌였던 이괄의 난까지 겪은 뒤였다. 병자호란에서도 청나라 군대는 한양을 점령하여 약탈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했었다.

서울을 위태롭게 하는 호랑이 기운은 좀처럼 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1841년 상궁 남씨와 유씨의 후원으로 호압사의 법당을 새로 지은 뒤에, 의민(義旻) 스님이 쓴 <경기좌도 시흥 삼성산 호압사 법당 현판문(京畿左道始興三聖山虎壓寺法堂懸板文)>에서도 호압사가 ‘조선이 처음 터를 세울 때 호랑이 혈[虎穴]을 진압했던 곳’이라고 적었다. 

운무증청변화호(雲霧蒸靑變化乎) 
차산전체류어토(此山全體類於菟) 
고인염양무궁의(古人無窮意) 
호압사암사견우(虎壓獅菴四犬隅)

구름과 안개 기운 푸르게 바뀌는데 / 이 산 전체가 호랑이 닮아있네 / 옛 사람들 액막이하려는 무궁한 뜻으로, 호압사, 사자암, 사견우를 마련했지.

관악산과 호암산 사이에 있는 신림(新林: 현재의 신림동)은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여겨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자하동(紫霞洞)인데, 그곳에 대대로 내려온 산장(山莊)에 살던 자하 신위(申緯, 1769~1845)가 호암산을 제재로 하여 쓴 8편의 연작시 중 마지막 편이다. 그는 호암산의 경관, 시간과 날씨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하는 신비한 형상을 언급하다가 마지막에 절과 암자를 세워 재액을 막으려했던 옛 사람들의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평주맥랑범유유(平疇麥浪泛油油)
우후경풍삽삽추(雨後輕風颯颯秋)
작약화심훈일동(芍藥花深薰一洞)
포도엽대음전루(葡萄葉大蔭全樓)
독서경귀수금주(讀書竟晷誰禁住)
피취겸순부자유(被醉兼旬不自由)
호압삼한전보찰(壓三韓傳寶刹)
명조공극여양구(明朝筇屐與羊求)

들판 보리밭 물결 윤기있게 넘실대고 / 비 갠 뒤 산들바람 서늘하기도 하네 / 작약 꽃 향내 온 골짝에 가득하고 / 포도 잎 커져 누각을 전부 덮어버리네 / 독서 마쳤으니 누가 머무는 것 말릴까만 / 술 취하면 열흘을 못 움직이지 / 호압사는 삼한의 보배로운 절이니 / 내일 아침 친구들과 찾아 보려네.

조선 후기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이 단구노인(丹邱老人)과 호압사로 놀러가자고 약속하고 쓴 시이다. 그의 눈에 비친 호압사는 작약 향기가 가득하고, 포도 덩굴이 무성하게 자라는 초여름의 풍광이 아름답게 펼쳐진 곳이다. 1852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는 철종 3년으로 조두순은 판서 벼슬에 있었다. 40년 동안 그 흔한 유배 한 번 가지 않고,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4명의 왕을 모신 조두순의 한창 때였다.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한 그는 호압사를 다녀온 이듬해인 1853년 드디어 우의정이 되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관운이 막히지 않고 뻗어나갔던 것은 호압사가 한양을 위협하는 사나운 기운을 누른 것도 일조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노래를 불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호압사를 둘러싼 이야기에는 수도 서울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역사의 풍파를 겪거나 이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호압사는 더 이상 그런 어려움이 생기지 않기를 희구하는 상징이었고, 현실이 아름다운 이들에게 호압사는 그런 현실을 기꺼워하고 유지되기를 기원하는 공간이었다. 

김일환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조교수

[불교신문 3812호/2024년3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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