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슬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받아들일 뿐이다. 이 경험도 나의 일부이고, 나이기 때문에 이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사랑한다. 그들도. 나도. 그래서 더 잘 살아야 한다.

강산 불교크리에이터
강산 불교크리에이터

‘술집’ ‘바이크’ ‘당근마켓’ ‘싸이월드’ 등의 단어 앞에 공통적으로 붙는 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바로 ‘아무튼’이다. 3곳의 출판사에서 ‘아무튼 ○○’이라는 시리즈 형식의 책들을 출간하고 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아무튼스러운 가벼운 이야기부터 저자의 어릴 적 집안 사정까지 아주 깊은 이야기를 함께 경험할 수 있다. 우연하게 주운 누군가의 일기장을 보면서 함께 울며, 웃으며 정독하는 기분이 드는 시리즈이다. 이렇게 깊은, 또는 얕은 글이 담겨 있으니 아무튼이라는 뜻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내가 이러한 책을 쓴다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죽음. 책의 제목은 ‘아무튼 죽음’이 되겠다. 1년 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두 번이나 경험했으니 말이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우울감에 병원을 가보기도 하고, 먼저 다가온 죽음의 경험들이 다음 죽음을 정리하는데 앞장설 수 있게도 했으니 말이다.

대비한다고 대비할 수 없는 게 죽음이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은 것이 죽음이다. 그대가 언젠가 겪을, 혹은 바라볼 죽음에 조금 더 대면할 수 있게 내가 맞이한 죽음의 경험들을 적어본다.

필자는 2022년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를 먼저 보내드렸다. 그리고 일 년 뒤 필자를 아들처럼 생각해 주시던 큰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사망선고. 누군가 죽게 되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사망선고가 필요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의사의 사망선고를 기억하면 된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에 따라 절차가 더 생겨날 수 있다. 국내법에서 사망선고는 오직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조산사(단, 자신이 조산한 태아만 가능)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죽음에 당황해할 시간이 없다. 누군가는 이 많은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 정신을 차리고 일이 끝나면 슬퍼하자. 고인의 장례를 치를 곳을 먼저 구해야 한다. 그럼 그곳에서 고인을 모시러 오거나, 병원이나 구급차를 통해 장례식장에 고인을 모셔다드리기도 한다. 지금 당신은 참 많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들어준 부고 문자를 주변에 전달하도록 한다. 이때 꼭 SNS와 일반 메시지를 둘 다 사용하도록 하자. 전달받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갖는 주변인이 생길 수 있다.

두 번의 죽음의 경험이 있지만, 장례기간 동안의 기억이 모두 희미하다. 그만큼 고되고 힘든 시간들이다. 조문객, 부의금, 화환 모두 기억할 수 없다. 기록해라. 언젠가 이 감사함을 갚아야 한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장을 한다. 특히 겨울에는 사망자가 급증하여 이 화장장을 예약하기가 더욱 어렵다. 장례가 시작되는 동시에 발인할 장소와 시간을 정해둬야 한다. 그 일이 선행된 뒤 장례 일정에 대한 소식을 주변에 전하도록 하자.

장례를 마치더라도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죽음에 대한 정리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평소 고인에 대한 금전적인 관계를 모르고 있다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아진다. 금융결제원에서 운영하는 ‘내 계좌 한눈에’라는 사이트가 있다. 계좌 잔액, 대출, 보험까지 알 수 있으니 사이트를 이용해 보자. 이 사이트를 가입하려면 공인인증서나 금융인증서가 필요하다. 고인 명의의 핸드폰을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인인증서보다는 금융인증서 발급이 수월하며, 이 금융인증서가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시작점이다.

내 마음은 아프다. 외롭다. 슬프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분노감이 올라온다. 현실을 부정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이내 곧 그 분노감은 슬픔으로 바뀌고 외로움과 우울함이 찾아온다. 태어나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들이다. 국적 나이 등을 불문하고 경험만이 이 감각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이 심해지면 주변의 도움을 꼭 받도록 한다.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이 나를 위해 바뀐다. 그 마음이 괜찮아질 때쯤 나를 위해서 살게 된다. 그래야 그들이 행복하리라 내 마음을 추스른다.

죽음에 대한 슬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받아들일 뿐이다. 이 경험도 나의 일부이고, 나이기 때문에 이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사랑한다. 그들도. 나도. 그래서 더 잘 살아야 한다. 앞으로 몇 번의 죽음들을 경험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와 우리의 죽음을 당신도 조금은 더 의연하게 대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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