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불교전래와 삼국시대 불교향로

백제 7세기에 제작된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7세기에 제작된 백제금동대향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후반으로 372년 고구려를 시작으로 384년 백제, 527년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며 불교는 삼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 불교전래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의 남북조와 교류하면서 불교의례와 불교미술 등 제 방면의 불교문화를 수용하였고, 의례를 설행하면서 향로도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삼국시대 불교의례와 行香

불교전래 후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다양한 불교의례가 설행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삼국시대 불교의례는 팔관회(八關會)와 백고좌회(百高座會), 점찰법회(占察法會)와 강경(講經) 등이다. 문헌 기록상 고구려에서는 강경만이 있으나 551년 신라에서 설행된 백고좌회와 팔관회는 고구려 승려 혜량(慧亮)의 주관하에 거행된 것이어서, 고구려에서도 같은 의례가 설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불교의례는 강경과 왕흥사(王興寺) 낙성식 행향만이 기록되어 있다. 반면 신라 불교의례는 팔관회, 백고좌회, 점찰법회, 강경 등 가장 다양한 불교의례가 설행되었다. 삼국시대 불교의례의 절차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의례의 성격에 맞게 향을 피우고 행향을 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팔관회가 어떻게 설행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려의 팔관회에 행향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신라에서도 행향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행향이란 불승(佛僧)을 청할 때 향을 스님의 손에 놓은 것으로 행향을 할 때는 병향로를 사용하였고, 사찰 낙성식 등에도 행향을 하였다.

신라 7세기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북쪽 암벽면에 새겨진 공양자상의 병향로.
신라 7세기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북쪽 암벽면에 새겨진 공양자상의 병향로.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의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백고좌회로 <인왕경(仁王經)> ‘호국품(護國品)’에는 백고좌회에 관한 내용이 있다.

“나라의 영토가 혼란 속에 있거나, 망하려 하거나, 침략을 받거나, 불타려 하거나, 혹은 적이 나라를 침범할 때는 각각 100개의 불상, 보살상, 나한상을 준비하라. 그리고 100명의 비구, 사대중, 칠중이 다 같이 듣도록 100명의 법사를 초청하여 반야바라밀다를 강의하게 하라. 높게 설치된 100개의 사자좌 앞에서 100개의 향기 좋은 향을 태우고 100가지 꽃으로 삼보를 공양하라.”

신라의 백고좌회가 <인왕경> ‘호국품’의 내용처럼 설행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백고좌회에는 수많은 향로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병향로

삼국시대 불교의례와 관련하여 사용된 불교향로에는 병향로(柄香爐)와 거향로(居香爐)가 있다. 삼국시대의 병향로는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사용 예가 확인되고 있으나 백제는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 불교의례에 사용된 병향로는 작미형병향로(鵲尾形柄香爐)이다. 작미형병향로는 병향로 손잡이 끝부분이 까치꼬리와 같은 모습이어서 붙여진 명칭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경까지 사용하였다.

고구려 7세기에 제작된 작미형병향로(鵲尾形柄香爐)로 길이 39㎝이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고구려 7세기에 제작된 작미형병향로(鵲尾形柄香爐)로 길이 39㎝이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삼국시대의 병향로 중 실물로 남아있는 것은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법륭사 헌납보물 282호인 작미형병향로이다. 이 향로의 손잡이 뒷면과 꽃모양 받침 아랫면에 혜자(慧慈)’와 ‘대방(帶方)’이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 영양왕대의 혜자(?-622) 스님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병향로의 반구형 금구 장식은 중국의 것보다 높게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내재적인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병향로는 실물로 남아있는 것은 없고 조각의 부조상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경주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마애불상군의 북쪽 암벽면에는 공양자상이 새겨져 있다. 두 명의 공양자는 오른쪽을 보며 진행하는데, 앞쪽의 인물은 머리에 높은 모자를 쓰고 저고리와 넓은 바지를 입고 있으며, 두 손으로 병향로를 들고 있는데, 작미형병향로로 추정된다.

백제의 병향로는 기록상으로만 확인되는데,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武王)이 왕흥사(王興寺) 낙성식(落成式)에 행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계율에서 확대된 의미로 행향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거향로

삼국시대의 거향로 가운데 실물로 남아있는 것은 백제금동대향로가 유일하다. 고구려에서는 고분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신라의 거향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의 거향로는 안악(安岳) 3호분을 비롯해 장천(長川) 1호분과 쌍영총(雙楹塚) 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악 3호분 벽화의 향로는 불교 전래 이전의 것으로 안악 3호분 ‘묘주부인도(墓主婦人圖)’에는 묘주 부인을 중심으로 왼쪽에 두 명, 오른쪽에 한 명이 시녀가 묘사되어 있는데, 오른쪽의 시녀는 양손으로 향로를 받치고 있다. 이 향로는 실내에서 방향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고구려 6세기에 그려진 쌍영총 공양행렬도의 향로.

쌍영총 널방 왼쪽벽에는 ‘공양행렬도(供養行列圖)’가 묘사되어 있는데, 머리에 향로를 지고 가는 인물과 승려, 시녀, 귀부인, 시녀들의 순서로 행렬이 이어지고 있으며, 승려와 귀부인은 크게 묘사되어 있다. ‘공양행열도’의 향로는 승반과 기둥 형태의 간주와 몸체로 구성되었는데, 형태상 불을 피우는 등과 같은 모습이다.

장천 1호분 여래좌상 방형대좌 중앙에는 향로가 묘사되어 있다. 이 향로는 받침과 간주, 몸체와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형향로(豆形香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거향로는 1993년 10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가 유일하다. 이 향로는 높이가 64cm에 이르는 대작으로 아래로부터 한 마리의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몸체 하부의 간주를 물고 있는 받침과 양감 연잎이 중첩된 몸체와 산악으로 중첩된 뚜껑 및 날개를 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봉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동아시아 최대의 불교향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라의 거향로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에서 병향로를 사용하였고, 고구려와 백제에서 불전용 거향로를 사용하였으며, 백고좌회와 같이 수많은 거향로가 필요했던 의례를 설행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신라에서도 거향로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불교의례용으로 병향로와 거향로를 사용하였다. 병향로는 시기적으로 작미형병향로를 사용하였고, 거향로는 두형, 박산형 등의 향로를 사용하여 삼국이 동일한 것을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주변국과의 교류 속에서 내재적 발전 과정을 거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용진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이용진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불교신문 3813호/2024년3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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