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락의 감정 교차되는 게 우리 삶
즐거움이 생기면 괴로움이 생겨나
동시에 생기나 동시에 느끼진 않아

현상세계 인연연기에 의해 상의상존
좋다 나쁘다는 情을 얹지 않아야 해
업장을 줄여나가는 방법 바로 ‘명상’

마음 고요히 하는 모든 방법이 '명상'
앉거나 서거나 걷거나 염불, 절도 포함
매 순간 들락날락하는 감정 내려놔야

열반재일인 3월24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선명상 강의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열반재일인 3월24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선명상 강의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법회에 동참한 조계사 청년회원들과 청소년 불자들.
법회에 동참한 조계사 청년회원들과 청소년 불자들.

출가열반재일을 맞아 마련된 ‘조계사 선명상으로 찾는 마음의 평안’ 법회의 마지막 날인 3월24일 두 번째 선명상 강의에 나선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이 불자들에게 선명상 수행을 당부했다. 열반재일이기도 한 이날 법회에는 조계사 청년회  회원들과 청소년 불자들도 동참해 총무원장 스님의 명상 강의를 함께 들었다.

총무원장 진우스님은 “현상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인연연기에 의해 상의상존하며 벌어지는 일들로 거기에 우리가 고락이라는 감정을 얹으면 업만 쌓일 뿐”이라며 “고락의 감정이 윤회시키지 말고, 중요한 것은 자기 감정을 살피는 것으로 육바라밀 명상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우스님은 “좋고 싫은 감정이 주식 그래프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게 우리의 삶”이고 고락의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윤회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 감정 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이다. 감정 덩어리는 교차하는데, 정교하게 시간에 맞춰서 나타나고 사라진다. 태어나는 동시에 죽는 때가 정해져 있듯이, 기분 좋은 때가 생기면 반드시 동시에 기분 나쁜 때가 정해져 있다.

고락 두 감정은 서로 의지해 나타나며, 하나만 존재할 수 없다. 진우스님은 “1년을 놓고 볼 때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는 똑같다.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돼 나가는 게 1mm도 차이가 없다”며 “마찬가지로 우리 감정도 즐거움의 총량과 괴로움의 총량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생만 따져보면 누군가는 고(苦)업이 커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낙(樂)업이 커보이지만, 이는 시간 차이에 불과하며, 삼세를 살펴보면 총량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총무원장 스님은 “우주삼라만상은 인드라망처럼 연결돼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잘되고 잘못되고가 없다”며 “벌어지는 현상에 내 감정을 얹지 말라”고 했다. 좋고 싫다는 감정을 더하는 순간 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윤회도상에서 벗어나라고 하셨다.

진우스님은 “업장을 줄여나가는 게 관건으로, 감정, 고락을 줄이기 위해 명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고 일여(一如)하려고 하다보면 일상생활이 다 선이 돼 찰나찰나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감정, 자기 업을 줄여나가면 언젠가는 어디에 있더라도, 행주좌와 어묵동정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그러면 부처의 길로, 보살의 길로 가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육바라밀을 행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선명상 강의를 듣는 사부대중.
총무원장 진우스님 선명상 강의를 듣는 사부대중.
총무원장 스님 강의를 듣는 불자들.
총무원장 스님 강의를 듣는 불자들.
대웅전 밖에서 강연 듣는 불자들.
대웅전 밖에서 강연 듣는 불자들.

다음은 총무원장 스님 강연을 정리한 내용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열반재일 '선명상' 강의

인연연기에 대해 설명하는 총무원장 진우스님.
인연연기에 대해 설명하는 총무원장 진우스님.

여러분이 명상 강의를 잘 듣고 실참하면 괴로움,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이다. 만약 괴로움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하면, 잘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졸았다거나(웃음) 한 것일 수도 있다. 불교는 자업자득이고, 자작자수의 종교이다. 내가 얼만큼 불법을 체득하느냐에 달려 있다.

저는 과격하게 말해서 부처님 가르침은 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부처님께서 아무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처님 삶과 수행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천해나간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란 쉽게 말해,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아무런 괴로움이, 근심,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불만, 불평, 불안도 없는 완전무결한 편안함이다. 편안함마저도 인과에 걸려 이렇게 표현해서도 안되지만, 완벽한 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에 언어도단이라고 하고, 교외별전이라고도 한다. 내가 직접 체득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는 인과가 발생한다.

인과는 이것이 생기면 다른 이것도 똑같이 생기고, 질량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상적이고 과학적인 얘기다. 나면 죽는 것이고, 젊으면 늙고, 지금 건강하면 병든다. 이것이 생기고 저것이 생기는 게 인과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 감정도 좋은 게 생기면 싫은 게 생긴다. 기쁨이 생기면 슬픔이 생기고, 즐거움이 생기면 괴로움이 생긴다. 동시에 생기지만, 동시에 느껴지지 않는다.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이라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동시성이다. 심리학자고 불교학자인 칼 융은 ‘동시성’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일어나는 일과 저기서 일어나는 게 한 가지 형태로 일어난다는 뜻이다. 직접적인 인과와는 차이가 있다.

우주삼라만상이 연결돼 있다. 공기에도 입자가 있고, 입자와 입자는 연결돼 있다. 물질은 원자로 구성돼 있는데, 원자와 원자도 서로 연결돼 있다. 지금 말하는 것도, 공기 속 입자가 연결돼 전달되는 것이다. 우주가 얼마나 큰지 지금도 측정을 못하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인간이 가진 관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으로 못하리라고 본다. 겨우 발견한 게 빛의 속도이다. 빛은 1초에 30만km를 간다. 지구를 7바퀴 반을 돈다고 하겠다. 찰칵하는 순간 지구 4바퀴 반을 도는 빛이 현재까지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60만km 떨어진 곳에는 2초 후에 전달되는 것이다.

강의를 듣는 스님과 불자들.
강의를 듣는 스님과 불자들.

우리가 사는 태양계가 우주 안에 몇 개나 될까. 발견된 것만 해도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우리가 보는 은하계도 몇억 광년 떨어진 별이 있다. 1억 광년이면 빛의 속도로 가도 1억 년이 걸린다. 얼마나 먼 거리인가. 인간이 아무리 연구를 해도 빛의 속도만큼 빠르기로 가도 가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주는 연결돼 있다. 가는 속도만 있을 뿐이지, 연결돼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속도만 제외하면 동시에 뭐든 다 연결이 돼 있어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심전심이다.

복잡하고 어렵고 방대한 이론과 과학이 있을지라도, 내가 기분이 좋아야 한다. 내가 기분 나쁘면 세상이 다 극락이 돼도 말짱 도루묵이다. 명상을 하는 이유이다. 나의 기분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명상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이 어떻고 은하계가 어떻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금강경> 사구게에서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집착할 게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내가 집착하고, 아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情)이 발생하면서 즐겁고 괴로운 감정이 나타난다. 유식에서는 삼수작용이라고 해서 고(苦) 락(樂) 사(捨)라고 한다. 고락의 두 가지 감정은 인과라고 해서 서로 의지해서 나타난다. 괴로움이 없으면 즐거움도 없다. 즐거운 감정이 없으면 괴로울 필요도 없다. 상의상존 관계이다.

고락의 감정이 계속 교차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좋고 싫은 감정이 주식 그래프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왔다 갔다 한다.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두 가지 감정을 조금 더 나누면 삼악도와 삼선도로 나눌 수 있다. 천상, 인간, 수라 삼선도와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를 반복하는 것이다. 세상에 극락만 있나. 극락 하는 순간 지옥이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게 동시성이다. 극락만 있으면 굳이 극락이라고 할 필요가 없고, 지옥만 있으면 굳이 지옥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서로 상대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소위 인과라고 한다.

문제는 감정 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이다. 감정 덩어리는 교차하는데, 정교하게 시간에 맞춰서 나타나고 사라진다. 기분 좋은 때가 반드시 생기는 동시에 기분 나쁜 때가 정해져 있다. 태어나는 동시에 죽는 때가 정해져 있다. 아무도 모른다. 변할 수도 있지만 일단 정해진다. 해가 뜨는 동시에, 해가 지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변하지 않는다. 날이 밝음과 동시에 밤이 정해진다. 아침이 발생하는 순간 저녁이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리 마음도 기쁨이 발생하는 순간 슬픔이 정해진다. 춘분이 생기면 추분이 정해진다. 동지가 생기면 하지가 정해진다.

지금 즐거운가. 즐겁다면 괴로움이 정해져 있다. 어떤 형태로 괴로움이 올지는 앞으로 과학이 밝혀내야 할 문제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이다. 내가 지금 괴로워죽겠다. 내가 죽어야겠다고 고민하다가 죽지 않는 경우가 있다. 죽는 것보다 지금 안 죽는 게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는 게 더 낫다고 하면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들 생각은 지금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강의하는 총무원장 스님
선명상 강의를 듣는 청년불자들.
선명상 강의를 듣는 청년불자들.

그 찰나의 순간에도 고락, 육도윤회가 돌아간다. 1시간 안에, 1년 안에, 10년 안에도 인생을 놓고 봐도, 삼세를 놓고봐도 그렇다. 인생만 놓고 보면 고락의 계산이 잘 안 나온다. 어떤 사람은 더 잘 살다 죽는 것 같고, 어떤 사람은 괴롭게 죽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우리는 현생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내가 이렇게 생기게 된 바탕, 내가 이런 마음을 갖게되는 성격이나 성질, 마음에 관한 모습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서 나온다. 부모를 만난다는 것은 나와 유유상종한 식(識)끼리 만난 것이다. 부모의 식과 나의 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끌어당겨 정이 왔다 갔다 한다. 그러니 닮을 수밖에 없다. 부모 이전 조상들의 삶에 내가 포함돼 있다.

나는 왜 이럴까. 자기 성질을 자기가 만들었는데 왜 모르는가. 그래서 전생이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는 없다. 과학이 발달한다면 이 사람이 전생에 무엇이었는지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생도 마찬가지이다. 몸만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몸은 물질로 구성된 것으로 인연 연기로 지수화풍으로 구성된 것이다. 몸은 인연 연기에 의해서 구성될 뿐이다. 내가 이렇게 생긴 것도 인연 연기에 의해 생긴 것이다. 문제는 내가 못생겼다, 잘생겼다 해서 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감정이 나타난다. 좋고 싫은 감정이 나타나,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보고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거울만 봐도 기분 나빠한다. 그것은 좋고 싫은 감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감정이다. 감정이 있는 중생을 유정(有情)이라고 한다. 감정이 있다고 해서 유정이다. 감정 덩어리가 유정인데, 내 몸은 지수화풍 사대의 일환이기 때문에,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면 좋고 싫은 감정만 오롯이 남는다.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그 감정을 귀신, 영가, 영혼이라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과거는 현상적으로 사라졌지만, 과거라는 사실만은 남아 있다.

과거에 가졌던 감정 덩어리, 이것은 크게 나누면 고락,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으로 이뤄졌다. 두 감정은 서로 의지해 하나만 존재할 수 없다.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의 총량은 같다. 1년을 놓고 볼 때 낮의 길이와 밤의 길이는 똑같다.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돼 나가는 게 1mm도 안 틀린다. 마찬가지로 우리 감정도 즐거움의 총량과 괴로움의 총량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지금 현재 내가 살면서 느껴지는 감정에 즐거움이 90이라고 하자. 그러면 괴로움은 110이 돼야 한다. 현생에 있어서 나머지 차이는 왜 생길까. 괴로움과 즐거움의 총량이 똑같지 않다면, 시간 차이 때문이다. 괴로움 감정과 즐거움 감정은 똑같은데, 언제 어떻게 나타나느냐는 차이이다. 동지와 하지 때 해의 길이의 차이 정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면서 괴로움이 클 때가 있고, 즐거움이 클 때가 있는데, 전생까지 따져봐야 할 일이다. 우리가 흔히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하는데 금생에 조금도 좋다면 그런 이유에서이다.

고락이라고 하는 감정 덩어리가 모든 것의 원인이자, 결과일 수밖에 없다. 불교는 감정 덩어리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해탈이라고 한다. 감정에서 풀려난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은 인연연기에 의한 것으로, 서로서로 의지해서 돌아간다. 거기에는 시비고락이 없다. 우주삼라만상은 인드라망처럼 연결돼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잘되고 잘못되고가 없다. 지진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이고, 벼락이 쳐 뭔가 희생이 된다고 해도, 벼락 또한 온갖 원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피해를 준 것일 뿐이다. 현상세계는 잘되고, 잘못됐다고 평가할 수 없다. 문제는 고락, 내가 평가를 하면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꽃을 보면 우리는 즐거움과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꽃은 이름이 꽃일 뿐이다. 물과 흙, 영양분에 의해 피어날 수밖에 없는 하나의 현상이다. 현상을 보고 우리가 감정을 얹는 것이다. 즐겁고, 예쁘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나. 모든 현상에 자신의 감정을 얹는 것이고, 기분 좋아지려고 하고 행복해지려고 한다. 권력과 명예, 돈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인연현상이다. 운이 좋았던 나빴던 인연현상에 의해서 벌어지는 것인데, 거기에 내 감정을 얹는다. 기쁘고 좋아하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원했는데 돈이 모이지 않고, 쫄딱 망했다고 하자. 그러면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고락이라고 하는 감정 덩어리가 시간 차로 적재적소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정의 총량은 같다. 즐거움을 즐긴 만큼 괴로움도 발생 예정이다. 그러면 괴로운 일이 반드시 생긴다. 더 좋은 조건에서도 기분이 나빠지고 괴로움이 생길 때가 있는데, 즐거움이 일어나는 순간 괴로움의 순간이 정해져 언젠가 괴로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복권에 당첨됐다면 어떨까. 졸도할 만큼 기분 좋다고 하자. 그 지수를 1000만큼이라고 하면, 1000만큼 기쁨을 느꼈다면 그만큼 괴로움이 예정이 됐다고 생각해야 한다. 예기치 않게 암 진단을 받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특히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날 괴로움을 당하기도 한다. 착하게 사는데 괴로움이 벌어질까. 그 사람은 즐거움을 다 써먹었다는 얘기이다. 그만큼 과보를 받는 것이다. 소위 업과라고 한다. 감정 덩어리를 업이라고 한다. 업은 인과이다. 인과는 윤회한다. 고락의 인과는 윤회하면서 총량을 따져보면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윤회도상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제가 불교가 간단하다고 한 것은, 이 세상 돌아가는 게 인연연기에 의해 상의상존하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 말고 자연이나 물질만 연기라고 생각하는데, 가족, 친구, 이웃, 사회, 국가도 다 연기적 현상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서로 만날 수밖에 없고, 떨어질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 무엇이 잘못됐다, 잘 됐다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각자 가진 감정을 얹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업을 얹는 것이다. 괴롭고 즐거운 감정을 교차해서 얹어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즐거운 만큼 괴로운 감정을 받는 것이다.

저 또한 태어난 과보로 죽을 것이다. 죽을 때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괴로운 마음으로 있나, 즐거운 마음에 있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에 있나. 여러분 가족을 정말 소중히 여기지 않나. 가족의 정이 많다. 솔직히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산다는데 정말 그런가. 잘 계산을 해보자.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남을 위한다는 것은 내가 즐겁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을 준다는 것은, 내가 정을 줌으로써 더 큰 행복과 기쁨을 느껴야 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자식이다 부모다 정을 주고 받는 게, 윤회를 부추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이 죽으면 정이 남는다. 과거가 남는 것이다. 과거에 주고받았던 정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식이다. 아뢰야식, 말라식이 됐던 식이고, 그것을 영혼이라고 한다. 그 식이 돼지에게 붙었다고 하자. 그럼 내가 돼지고, 내 새끼는 돼지이다. 그럼 나는 돼지에게 정을 준다. 과거에 인간 세계에 살면서 낳았던 새끼는 안중에도 없다. ‘정’만 남는 것이다.

정이라는 것은 일종의 식이다. 이것만 오롯이 남아 움직인다. 정은 고락으로 돼 있고, 고락은 서로 총량이 같다. 인과작용을 한다. 인과가 윤회하는 게 우리의 삶이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기쁨, 즐거움, 행복이 결국은 괴로움, 고통, 슬픔, 번뇌로 똑같이 생기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 즐거움을 얻으려면 괴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건강을 얻으려면 병을 감수해야 하고, 살아있다고 하면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인연 법칙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 연기에 의해 서로 주고받기 때문에 시시비비할 게 없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라고 했다. 내가 내 고락의 감정덩어리로 세상을 평가하니까 분별하게 된다. 분별해서는 안 된다. 지금 만약 내가 기쁘고 즐거운 업이 나올 시간이라고 하자. 그 때 복권에 당첨됐다. 복권에 당첨돼서 기쁜 게 아니라, 내가 기분 좋은 시간이 돼 기분이 좋을 뿐이다. 과거에 지은 고락의 업에 의한 것으로, 그 시간에는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복권에 당첨된 것은 인연 현상에 의한 것으로, 안과 밖에 동시에 이뤄진다고 해서 이것을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한다.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감정 덩어리는 밖의 현상과 동시에 일어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락의 감정 덩어리가 괴로움이 나타날 업의 시간이면 괴로운 일이 생기고, 즐거움이 나타날 업의 시간이면 즐거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로 우리가 세상을 감지하는데, 육경 현상이 사실은 생로병사하고 성주괴공, 생주이멸한다고 하는데 실체도 없거니와 집착할 것도 없다. 부처님 말씀대로 여몽환포영이다.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은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계속 좋다 나쁘다 시시비비하는 것은 즐겁고 괴로운 내 업 때문이다. 즐겁고 괴로운 업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처님께서 윤회라고 했다. 분별업식을 없애는 것을 업장소멸이라고 한다.

지금 만약에 여러분이 기분 좋은가, 나쁜가 보라. 기분이 나쁘다면, 제 강의가 기분 나쁜 것도 있지만, 기분 나쁜 업이 나타날 때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중에 기분 좋거나, 나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업 때문이다. 분별업, 인과 때문이다. 내가 직업이 뭐가 됐던, 어디서 살든, 어떻게 생겼는지와는 상관없다. 다만 나의 기분이 좋고 나쁜, 업을 얹으니, 좋게 보이고 나쁘게 보이는 것이다.

누군가는 제게 총무원장이라서 좋겠다고 한다. 솔직히 저는 총무원장이 됐던 안됐던 상관없다. 때로는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상관없다. 왜냐, 제가 감정을 일여(一如)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기복이 없다, 무한히 편안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가시방석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금방석 위에 앉아 있어도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금방석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하는 것이다.

명상 강의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명상 강의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청법가를 부르는 청소년들.
청법가를 부르는 청소년들.
조계사 대웅전에서 선명상 강의하는 총무원장 진우스님.
조계사 대웅전에서 선명상 강의하는 총무원장 진우스님.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인류 최고의 발견이다. 다 내 마음이 만든 것이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를 막론하고 부처님께서는 평등하다고 했다. 사실 다 평등한데 본인이 업을 지어서, 고락을 일으키는 것이다. 업이 큰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업이 큰 사람은 즐거움도 크고, 0.1g 차이 없이 괴로움도 크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현상 자체가 그렇다. 밀물과 썰물의 길이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보라. 내가 간 길이와 온 길이가 어떤지 봐라. 똑같을 수밖에 없다.

업이 없는 사람은 공(空)이다. 업장소멸이 된 상태, 해탈이 된 상태, 열반이 된 상태, 피안이 된 상태, 성불이 된 상태로, 이것을 부처라고 한다. 공에 고락을 아무리 집어 넣어도 공이다. 부처님 마음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언어도단, 교외별전, 불립문자이다. 우리는 업장을 줄여나가는 게 관건이다. 감정, 고락을 줄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명상을 하라는 것이다. 선이라는 것이 일여(一如)하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이 다 선이 돼야 한다. 찰나찰나가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일희일비하지 마라. 새옹지마 영감님처럼 일희일비 할 필요가 없다. 인연따라 돌아가기 때문에, 인연 연기법 자체가 부처님 몸이고,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일여한 마음을 가지려면 내가 가진 감정덩어리를 순간순간 놔버려야 한다.

우리가 ‘화두’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화두를 간하면서 보는 게, 간화선이다. 스님들이 하는 수행법이다. 간화선은 화두 하나, 무자라던가 이뭣고, 시심마라는 화두를 하나 들어서 내 감정을 그대로 내려놓는 것이다. 거기에 뭐 더하고 뺄 것 없이 그대로 내려놓는 것이다. 분별을 내려놓는 것을 연속하는 게 정진이자 선이다. 내가 생각을 안하면 어떻게 할까. 저절로 행동이 나오고, 말이 나오고, 생각이 나온다. 내가 억지로 생각하고 인위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면 인과의 업을 쌓을 수밖에 없다.

고락의 감정의 업을 없애기 위해서, 일단 내 감정을 추슬러야 한다. 고락 분별이 안되려면 내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모든 조건을 명상이라고 한다. 내가 지금 말을 하면서도 감정을 보며 내가 기분 좋고 나쁜 것을 알아서 업에 걸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을 깨어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기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감정 덩어리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내 감정 상태가 어디있는지 스스로 보는 것을 위빠사나, 사마타라고 하고, 그것을 단박에 끊어버리는 것을 간화선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간화선이 잘 안될 시에는, 내가 말하고 행동할 때 내 감정 상태를 들여다보라. 감정이 너무 격렬할 때는 들여다볼 생각조차 못한다. 화를 낸 후 나중에 과보를 받더라도, 과보를 받을 때조차도 마음을 탁탁 내려놔라.

마음을 고요히 하기 위한 모든 조건과 방법이 명상이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걷거나 밥을 먹어도 해도 되고 영화를 보면서, 책을 보면서 해도 된다. 들락날락하는 내 감정을 스스로 보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침잠하게 맞는 게 명상이다. 염불을 해도 좋고, 절을 해도 좋다. 스스로 감정 상태를 내려놓는 최고의 방법 중에 하나가 염불로,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명상을 해왔다. 여러 방법 중에 나에게 맞는 것을 택하면 된다.

내 감정 덩어리, 좋고 싫은 감정은 윤회하기 때문에 좋은 감정이 좋은 것만 아니다. 내가 가진 조건에 대해 자꾸 정을 얹지 마라. 윤회가 되고 인과가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살피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 자기 업을 줄여나가면 언젠가는 자나 깨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디에 있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면 부처의 길로 보살의 길로 간다. 적극적으로 행하려면 육바라밀행이 좋다. 육바라밀이 곧 명상이다. 보시행이 명상이고, 지계행이 명상이고, 인욕행이 명상이고, 정진도 명상이다. 선정지혜는 자동적으로 명상, 최고의 참선이다. 육바라밀을 해야 한다.

이날 강연은 조계사 유튜브로 생중계 됐다.
이날 강연은 조계사 유튜브로 생중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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